아사달에 정착한 고대의 한민족은 어떠한 신앙을 가졌으며, 어떻게 살아갔는가에 대해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위쪽 사진은 환웅천강도라는 중국에서 발견된 그림입니다.
이것은 우리 민족의 단군신화를 중국인마저도 그대로 믿고 그려놓은 것이지요.
위 사진은 동방에 정착한 셈계의 장자의 백성들은 땅에 충만 하라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아사달의 넓은 들판과 한반도에 퍼져 나가며 여러 지역에 흩어져 살았으나 임금을 세우지 아니하고 그들에게는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만이 신앙이 대상이었습니다.
그것은 규원사화 단군기라는 고대 역사책에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한 신으로 가장 높은 으뜸 자리에 계시며 천지를 창조하고 전 세계를 주관하고, 수 없이 많은 사물을 만드시니 넓고 넓게 둘러싸므로 들어 있지 않은 것이 없고, 아주 밝고 밝아 작은 티끌하나 새지 않도록 하시었다"
이 단군기에 보는 바와 같이 우리민족의 신에 대한 정의가 확실히 보여지고 있습니다. 유일신이요, 창조의 신이요, 빛과 같이 밝은 신이다. 더 이상 논의할 것이 없을 정도로 유대인의 야훼 하나님하고 정의가 똑 같습니다.
또한 고대 한국인들도 삼위일체 하나님을 섬겼다는 사실이 고조선의 역사학자였던 신지(臣智)의 역사책 삼일신고(三一神誥)에 나타나 있습니다.
"체일용삼(體一用三)이요 삼신일체(三神一體)요 회삼귀일(會三歸一)이라"
이렇게 쓰여 있는데, 이것은 몸은 하나인데 활동만 창조의 신, 구원의 신, 역사의 신 이런 식으로 활동만 셋으로 한다. 그리고 이 세 신은 사실은 하나이다. 이 셋이 모이면 하나이다. 이런 뜻입니다. 오늘날의 삼위일체 이론하고 완전히 똑같습니다. 그 까마득한 고대의 우리 조상들이 어찌하여 기독교의 신학에서도 가장 어려운 삼위일체 신학을 정통으로 꿰뚫었을까요?
그것은 원래 우리 민족의 집안이 셈의 제사장 집안이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학자인 윤내헌 교수의 고조선사 연구에 보면 "이는 3.1 사상 또는 삼위일체 사상이라고 하는데 그 후에 한민족 사상의 주요한 요소를 형성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 민족은 흑백논리도 아니고, 있다 없다도 아닌, 항상 세 개의 요소로 설명하고자 하는 의식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우리 민족은 임금일지라도 항상 나무로 된 집을 짓고 살았고, 돌로 된 집을 짓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이 땅은 나그네와 같은 삶이고 돌아갈 집이 저 세상에 있다는 나그네 정신이 투철했기 때문입니다. 이 나그네 정신과, 훗날에는 구원, 천국, 낙원이 올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복음의 전파가 없었을 때에도 자생적으로 메시아 신앙이 생겨나게 되었고, 옛날부터 지금까지 가지고 오게 된 것입니다. 물론 그것이 어떤 때는 미륵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정도령으로 표현되기도 하였지만, 사상 자체는 메시아를 갈망하는 사상이 우리 민족의 고유의 사상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김진홍 목사님의 강연에도 나옵니다.
그 다음으로, 고대 한국인이 지켜 오던 법으로서 팔조(八條)의 금법(禁法)은 유대인들의 십계명과 매우 유사합니다. 오히려 열 개로 늘려 있는 것을 십계명의 뜻은 다 들어 있는 일곱 가지와,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여덟 번째 계명이 들어 있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너희는 오직 한분이신 하나님만을 섬기라.
너희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모든 생명있는 것을 사랑하라.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보내신 너희 부모를 공경하라.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한다.
서로 시기하지 말며 간음하지 말라.
물건을 도둑질한 자는 도둑당한 집의 노비로 삼는다
남을 상해한 자는 곡물로서 갚아야한다.
약한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가난한 자를 구제하라.
또한 고대 한국인들은 수천 년 동안 왕을 세우지 않고 신정일치의 전통을 잘 이어왔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사무엘이 그토록 원했던, 하나님이 그토록 원했던 그 사상을 고대 한국인들은 오래도록 잘 지켜 온 것입니다. 즉 천군(天君)이라는 제사장의 인도 하에 신정을 유지해 왔습니다. 그리고 도읍의 이름도 신시(神市), 즉, 하나님의 도시, 하나님의 마을로 불렀던 것입니다. 나라를 세운 목적도 특정인의 이익이나 특정 종교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민족은 놀랍게도 '홍익인간(弘益人間)' 즉, 널리 사람 사회에 유익을 끼친다, 모든 인류에게 봉사한다는 뜻의 '이타주의 사상', '박애(博愛)사상', 즉 기독교로 볼 때 '아가페 사상'을 구현하기 위해서 나라를 세웠던 것입니다. 이런 사상을 위해 세워진 나라는 우리나라 외에는 이 세상에 아무 곳에도 없습니다.
그리고 단군(檀君)이 나라를 이끌어 왔는데요, 단군은 어떤 개인의 이름이 아니고 직책의 이름이었습니다. 단군(檀君)이란 신단수(神檀樹)라는 거룩한 나무 밑에서 제사를 인도하던 신정일치 사회에서의 천군(天君)을 뜻합니다.
즉 미스터 헤븐(Mr. Heaven)이지요. 생명나무(生命樹), 즉, 신단수(神檀樹) 아래에서 거룩한 제사를 지내던 천군(天君)을 줄여서 단군(檀君)이라고 한 것입니다. 고대 유대인들도 신이 정한 성역인 에덴동산 중앙에 서 있던 나무아래에서 신에게 경배하였는데요, 우리 민족도 신이 임하셔서 여러 가지를 듣고 지도하던 나무, 즉, 신단수(神檀樹)도 생명나무(生命樹)와 같은 개념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동방으로 이주한 우리민족은 하나님의 규례대로 장자권자(長子權者)가 백성을 보살피는 사랑의 공동체를 형성하였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대제국(大帝國)을 형성하였건만 아무도 영웅호걸을 숭상하지 않고 대제국이라는 이름을 절대로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무 기록도 남지 않아 그 대제국의 모습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중국인들이 우리민족을 격하시키기 위해 오랑캐라는 뜻의 동이족(東夷族)이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 글자 속에 큰 활이 들어가 있습니다. 동방에 있는 활을 잘 쏘는 나라라는 뜻이지요. 지금도 올림픽에서 활 쏘는 종목은 항상 금메달을 따오지요. 그것은 과거부터 우리민족에 그러한 소질이, 유전자가 들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동방족(東方族)이라 불리는 고대 한민족의 여러 나라들은 메소포타미아에서 동쪽으로 이주한 한 형제요 공동체의 나라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평화와 우애로 살았기 때문에 전쟁이 있을 이유가 없고 자기 자랑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인이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바빌로니아다, 앗시리아다, 징기스칸이다 하며 자기 이름을 남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이러한 지식의 부족으로 일부 학자들에 의해 약하고 부족한 민족으로 평가절하 되는 안타까운 상황입니다.
평화를 사랑한 우리 조상들은 흰옷을 즐겨 입어서 '백의민족(白衣民族)' 이라고 불려 졌으며, 큰 자는 작은 자를 섬기고, 작은 자는 큰 자를 공경하여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중국의 고대사를 기록한 역사서 중의 하나인 회남자(淮南子)는 이 동방에 있는 장자권의 나라, 곧 엘람과 앗수르의 나라를 군자의 나라라고 기록했던 것입니다. 회남자 대형훈(淮南子 隊形訓)을 한번 읽어보시겠습니까?
"동방에 군자의 나라가 있으니 동방의 덕목이 어진 고로 군자의 나라가 있다 하느니라."
'중국의 도덕이 땅에 떨어지고, 중국의 정치가 혼란에 이르면 동방에 가서 배워 오라.' 이것이 고대 중국사람들이 오랫동안 진심으로 의존했던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과연 21세기의 중국인들이 오늘날의 한국인들을 회남자(淮南子)의 이 말대로 보겠습니까? 그렇지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되지 않을까요?
"동방에 돈 독(毒)이 오른 나라가 있으니... 돈 독(毒) 의 나라라 하느니라."
한류열풍도 돈과 관련하여 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섬김과 사랑으로 이웃나라를 도와서 고대에 빛나던 한민족의 이름을 다시금 높여야 할 것입니다.
위쪽 그림은 고인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고인돌에 대해서는 무덤이다 제단이다 여러 가지 학설이 많습니다마는 원래는 제단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이 제단을 지키던 원로가 돌아가시니까 평생 정들었던 고인돌 밑에 묻어드리고, 그렇게 세월이 흐르다 보니까 제사보다는 형식만 남아가지고 조상 제사 드리는 무덤으로만 인식 되어 버린 것입니다.
고인돌은 대단히 큽니다. 어떤 것은 상판의 길이가 10m, 폭이 4m 되는 것도 있습니다. 엄청나게 큰 제단, 거대한 돌 강대상입니다. 그래서 그 위에 제물을 올려놓고 신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편집자 주: 세계적으로 고인돌은 'Dolmen'으로 불리운다. 이것은 우리말의 '돌멩이' 바로 그것이다)
전 세계에 고인돌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전 세계 고인돌의 50퍼센트가 한반도와 만주 땅에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우리 민족이 거의 대부분이 성직자 집안이었다, 곧, 전 세계 강대상의 50퍼센트가 우리나라에 있었으니, 우리는 제사장 집안이었다 하는 것입니다. 굉장히 종교적인 민족이었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세운 고조선의 영역을 지도로 나타내면 왼쪽 그림과 같습니다. 동방족들은 아리라, 곧 지금의 송화강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만주와 한반도, 그리고 일본에 이르기까지 골고루 흩어져 살면서 서로 섬기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따라온 중국인들, 곧 야벳 족속들은 중원대륙으로 내려갔을 때, 기술, 종교, 문화적으로 그 능력이 많이 부족했기 때문에, 동방족 형님들에게 계속적으로 도움을 청하게 되었으며, 동방족들은 중국인들을 계속해서 도와주다가 그중의 일부는 아예 산동반도에 정착하여 살았습니다. 산동반도와 중국의 동해안에 걸쳐 동이족들이 정착하여 살았습니다. 중국인들을 돕기 위해서였습니다. 이것은 중국의 역사기록을 토대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동방족들은 이 일대를 중심으로 해상왕국을 만들게 됩니다. 훗날 장보고 시절에도 이 지도가 그대로 복원됩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메소포타미아로부터 이주해온 경로를 잘 알기 때문에 심지어는 수메르의 잔재로 남아있던 나라, 비록 니므롯의 나라가 되어 버렸고 바벨론의 나라가 되어 버렸지만, 그 추억을 더듬어서 고대 고구려와 신라의 사신들이 도로 찾아가는데, 그 당시 역사기록을 보면 중동에 '수밀이국'이라는 나라가 있어서 '수밀이국'과 교통하였으며, 무슨 왕 몇 월 며칠에 '수밀이국' 사람 몇명이 찾아 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비록 수메르는 망했고, 이미 나라 이름이 바뀌었지만, 과거의 기억을 통해 여전히 수메르라고 불렀으며, 한자로 표현하다 보니 '수밀이'가 된 것입니다.
오른 쪽 그림은 수메르국 여인의 장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래 왼쪽 그림은 수메르 땅의 제국인 페르시아, 곧 성경의 '파사'지역에 남아있는 벽화입니다. 이 벽화에 보면 외국사신들을 맞이하고 있는 모습인데요, 제일 오른쪽에 보시면 긴 도포를 입고 머리에 깃털 장식을 하고 당당하게 칼을 차고 있는 이 청년은 바로 한국 (고구려나 신라)에서온 청년입니다. 그래서 고구려와 신라 사람들이 메소포타미아에 있는 여러 나라와 활발하게 교류를 나누었음을 이 벽화가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래 오른 쪽 그림은 고대 페르시아 제국의 수도였던 페르세폴리스에 남아있는 사신들의 행렬도 벽화입니다. 전 세계의 사신들이 페르시아 (파사)의 왕에게 알현하면서 선물과 조공을 바치는 모습이지요. 그런데 이 많은 사신 중에 몇몇 사람들은 까마득한 땅 끝, 동방에서부터 온 동방족 사신들도 있었던 것입니다.
규원사화
내용
서문·조판기(肇判記)·태시기(太始記)·단군기(檀君記)·만설(漫說)로 구성되어 있다. ‘규원’이라는 책 이름은 작자가 부아악(負兒岳:지금의 북한산) 기슭에 지은 자신의 서재 이름에서 딴 것이다. 작자는 서문에서 이 책을 쓴 동기가, 과거시험에 낙방한 자신의 울적한 심기를 달래려는 것과 왜란과 호란을 겪은 뒤의 민족적 울분 속에서 씩씩한 국사(國史)의 필요성을 절감했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왜란과 호란을 겪은 뒤에 여러 사서(史書)가 출간되어 애국심을 고취시키고 있었지만, 작자는 유학자들의 사관은 주체성 없는 존화사대사상에 젖어 있다고 비판하면서, 유학자들이 외면해 온 고기(古記)들을 참고하여 우리 나라 상고사를 재구성한 것이다.
작자가 참고한 책은 고려 말의 이명(李茗)이 지은 ≪진역유기 震域遺記≫인데, 이 책은 고려 초 발해의 유민이 쓴 ≪조대기 朝代記≫를 토대로 한 것으로 ≪삼국유사≫보다 훨씬 씩씩하게 쓰여진 사서이다. ≪조대기≫가 실재했던 고기임이 ≪세조실록≫을 통해서 확인되므로, ≪진역유기≫라는 책도 실제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 책의 <조판기>와 <태시기>에서는 환인(桓因)이라는 일대주신(一大主神)이 천지를 개창하고, 환웅천왕(桓雄天王, 일명 神市氏)이 태백산에 내려와 신정을 베푸는 과정이 서술되어 있다.
즉, 환웅은 신교(神敎)를 선포하고 치우씨(蚩尤氏)·고시씨(高矢氏)·신지씨(神誌氏)·주인씨(朱因氏) 등, 신하의 보필을 받아 366가지 일을 다스렸다는 것이다. 특히, 치우씨는 병기를 제조하고, 고시씨는 농업과 목축을 주관했으며, 신지씨는 문자를 발명하고, 주인씨는 혼인제도를 만들었다. 또한, 복희씨(伏羲氏)는 팔괘를 만들어 음양과 역학(易學)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단군기>에서는 환검(桓儉)으로부터 고열가(古列加)에 이르는 47대의 왕명과 재위기간, 그리고 각 왕대의 치적이 서술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치적이 많은 것은 환검이다. 그는 환웅의 아들로서 요(堯)임금과 같은 시기에 박달나라 임금이 되어 수도를 길림(吉林)에 두었으며, 9개의 대국과 12개의 소국을 거느려 그 영토는 멀리 요서(遼西)지방에까지 미쳤다.
이 시기에는 문화도 더욱 발전하여 8가(八加)의 관료를 두고, 제천(祭天)을 시작했으며, 8조의 가르침을 지어 백성을 교화하였다. 2대 임금 부루(夫婁)는 큰 홍수를 다스리고 도산(塗山)에서 하(夏)의 우(禹)임금과 만나 화해했으며, 환인·환웅·환검을 제사하여 비로소 삼신(三神)에 대한 제사가 확립되었다.
부루는 또한 중국의 순(舜)임금이 차지하고 있던 중국 동북지방을 빼앗고, 국내의 반란을 진압하여 옥저·비류·졸본을 거느리게 되었다. 부루 이후의 임금들은 그 치적이 간단히 처리되어 있는데, 47대 임금 고열가에 이르러 제후가 난립하면서 열국시대가 전개되는 것으로 <단군기>는 끝난다.
마지막으로 <만설>에서는 우리 나라가 만주를 잃어버린 뒤 약소국으로 전락한 것을 개탄하면서, 부강한 나라가 되기 위한 세 가지 조건을 제시한다. 그 첫째는 지리(地利)로써 잃어버린 만주땅을 되찾는 것이고, 둘째는 인화(人和)로써 당쟁을 버리고 단결하는 것이며, 셋째는 보성(保性)으로써 우리 풍토에 맞는 고유문화의 장점을 지니면서 남의 장점도 받아들이는 일이다. 저자가 강조하는 고유문화는 바로 단군시대부터 내려오는 신교(神敎)이며, 주자학은 사대사상의 근원으로서 철저하게 매도된다.
이 책은 결국 민족고유신앙인 신교의 입장에서 쓰여진 일종의 종교사화(宗敎史話)인데, 엄밀한 문헌고증의 토대 위에서 구성된 역사책이 아니라, 주로 전승되어 온 민속자료에 의거해서 엮어진 것이다. 따라서, 상고사의 역사자료로서 가치를 지닌다기보다는 한국문화의 저류를 이루어 온 민속적 역사인식의 한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 가치를 지니고 있다.
현재 우리 나라 역사의 창세기와 단군조선에 관한 기록은 고기라고 통칭되어 온 국내측 자료밖에 없다. 중국인들은 기자 이후의 역사만 적었을 뿐이다. 고기는 처음에는 삼신(환인·환웅·단군)에 관한 전설만 적었으나, 시대로 내려오면서 삼신 이후의 역사를 첨가해 놓았다.
예를 들어 조선 세조 때 권람(權覽)이 지은 ≪응제시주 應製詩註≫에서는 단군의 아들 부루가 도산에서 하우(夏禹)와 만났다는 이야기가 첨가되고, 18세기 초 홍만종(洪萬宗)의 ≪동국역대총목≫에서는 단군이 백성들에게 편발(編髮)과 개수(蓋首)를 가르치고 군신·남녀·의복의 제도를 정했으며, 단군이 팽오(澎吳)에게 명하여 국내의 산천을 다스렸다고 썼다. 그러나 대체로 유학자들의 역사책에서는 부루 다음의 왕들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단군시대 47대 왕명을 나열하고, 나아가 동이(東夷)라고 총칭되었던 동방의 여러 종족들을 단군조선의 주민인 배달민족으로 간주하여, 단군조선의 역사를 웅대한 대제국으로 재구성한 것은 대체로 한말의 대종교(大倧敎) 성립 이후부터이다. ≪단기고사 檀奇古史≫와 ≪환단고기 桓檀古記≫는 대종교인들이 쓴 대표적 사서로서, 전자는 대조영의 아우 대야발(大野勃)이 지은 것이고, 후자는 역대의 고기들을 모은 것이라고 내세우고 있다.
하지만 실은 한말·민족항일기의 대종교인들이 창작해서 넣은 대목이 적지 않다. 특히, 단군 47대의 왕명은 ≪규원사화≫의 기사를 그대로 전재하고 있어서, 이 책이 대종교의 역사관에 미친 영향이 적지 않음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규원사화≫나 그 영향을 받아 이루어진 대종교인의 사서들은 단군조선의 역사를 실제 이상으로 과장하여 서술하였으므로, 이를 역사적 진실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고 여겨진다.
더욱이, 동이족을 모두 배달겨레로 해석한 것은 여진족·거란족·몽고족 등 북방민족까지도 한민족으로 오인하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단군조선이 기원전 24세기에 이미 거대한 제국을 형성했다는 것도 문헌자료는 물론이요 고고학자료에 의해서도 아직 증명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책들이 조선 후기와 한말에 유행했다는 것은 그 나름의 사상사적 의미가 크다. 왜냐하면, 조선시대 사상사의 흐름 속에 유학자들의 역사의식에 대항하면서 그들에게 지속적인 자극을 주는 민족고유의 사상적 흐름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사상의 근간이 되는 단군민족주의가 민족항일기에는 독립운동의 거점 마련에 커다란 구심점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은율고인돌
황해도 은율군 운산리 소재. 길이 약 8미터로, 우리 나라에서 가장 큰 북방식 고인돌이다.
개설
고인돌은 청동기시대에 성행하여 초기철기시대까지 존속한 거석문화(巨石文化)의 일종이며, 고대국가 발생 직전의 사회상을 표현하고 있다. 고인돌은 지역에 따라 호칭이 다른데, 한국과 일본에서는 지석묘(支石墓), 중국에서는 석붕(石棚), 유럽 등지에서는 돌멘(Dolmen) 등의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2000년도에는 강화의 부근리·삼거리·오상리의 약 120여 기(基)의 고인돌군, 고창 상갑리·죽림리 등 고창군 전역 205군집(群集) 총 1,665기의 고인돌, 화순 효산리·대신리의 고인돌 500여 기 등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전 세계적인 관심 속에 보존·관리되고 있다.